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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 서울대서 강연한 이순재…"리더, 국민 뜻 포용해야"
면역보완대체요법
2008. 10. 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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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강단에 선 이순재 |
"지도자라면 국민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힘과 정성이 있어야 한다."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 '베토벤 바이러스' 등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배우 이순재씨(73)가 30일 오후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공개강연회를 열었다.
한때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던 이씨는 정치경험을 통해 두가지를 배웠다고 했다.
"책임이 큰 지도자일수록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 나를 반대하는 사람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는 열정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 혼자 독불장군처럼 해서는 아무것도 안돼."
허튼소리가 아니다. 1988년 얼떨결에 민정당 후보로 서울 중랑갑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낙선한 뒤 4년간 1년에 4차례씩 각 호를 방문하며 풀뿌리 정치 현장에서 체득한 교훈이다.
1992년 다시 도전장을 내민 그는 평민당 이상수 후보(전 노동부 장관)를 누르고 승리, 96년까지 14대 국회의원으로 문공위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재선에는 도전하지 않았다. 이씨는 "국회의원을 직업 삼아 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건 직업이 아니라 국가에 봉사하는 기간"이라며 "내 직업은 연기"라고 말했다.
이씨가 연기를 직업으로 선택한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철학과 출신다운 논리다.
그러나 연기인생을 지속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연기를 '딴따라'로 바라보는 시선도 극복하기 힘들었지만 출연료를 떼이거나 처음부터 '노개런티'인 경우가 많아 생활이 바닥 수준이었다.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하면서는 가족에게 짐이 되기 싫어 아예 연락을 끊었을 정도.
1961년 텔레비전 출연 이후 활동무대가 넓어지긴 했으나 한편 출연으로는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겹치기 출연이 필수였다. 60~70년대 영화 전성기에는 아침에 눈떠서 점심 때까지, 점심 먹고 저녁까지, 저녁 먹고 통금 때까지, 그리고 통금 이후 밤새 촬영하는 식으로 1년에 70∼80편을 찍기도 했다.
이씨는 이날 강연의 주제인 '나는 왜 아직도 연기하는가'에 대해 "작품 끝날 때마다 동료들과 뒷풀이 자리에서 술 먹고 우는 게 일이었다"며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연기를 계속한 이유는 예술적 완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 충동 때문"이라고 말했다. '예술을 한다'는 성취감과 자부심이 없다면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진지한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가 연기를 지금껏 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정년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자 좌중은 폭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최고의 원로 배우 중 한사람이 되기까지 그의 자연스러운 연기 뒤에는 말 그대로 '피눈물 나는' 노력이 있었다.
1982년 드라마 '풍운'의 대원군 역을 연기할 때에는 목소리가 칼칼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좋아하던 담배도 끊었다. 이같은 근성은 1960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극회 중심으로 이낙훈, 여운계, 오현경 등과 함께 설립한 실험극장 시절부터 길러졌다. 대본에 있는 '호쾌한 웃음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밤새 연습실에서 혼자 노래하고 괴성을 지르며 괴로워한 뒤에야 연출가의 인정을 받았다.
"예술에는 완성이 없으며 배우는 백지여야 하고 어떤 색깔이든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 2년 전 시트콤이라는 새 장르에 도전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씨는 "시트콤이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라 상당히 다양한 극적 요소를 갖고 있는 장르"라며 "웃기지만 그 웃음 가운데 은근히 콧날이 시큰해지는 페이소스, 사랑과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감동이 있어야 진짜 시트콤"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들 역의 정준하를 밥 먹듯 발로 찬 것도 다 사랑 때문이었다"며 눈을 찡긋했다.
이씨는 또 '연기의 기본기'로 정확한 발음과 언어 구사력을 유달리 강조했다. 올바른 한글 사용을 위해 한자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이에 서울대 총연극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재학생이 향후 서울대에서 연기 발성 및 발음 특강을 열어줄 것을 제안하자 "불러만 달라"며 흔쾌히 수락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