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는 사람은 목표가 있다. 자기가 오르려는 곳이 몇 미터인지, 어떤 곳인지 탐색하고 연구한 뒤 가능한 만큼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긴다. 바다를 찾아가면서는 수심을 확인하지 않지만 국립공원 입구에서는 반드시 지도를 확인하고 발걸음을 떼게 된다. 점령할 고지가 있는 사람은 쉽게 지치지 않는다. 순간에 취해 힘을 다 써버리지도 않는다. 차근차근, 그러나 꾸준히 능선을 따라갈 뿐이다. 목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디어 쥐어짜내는 데 일주일 소비 요즘 KBS2 -TV ‘개그콘서트’에서 ‘황현희 PD의 소비자 고발’과 ‘많이 컸네 황회장’ 두 코너를 동시에 선보이며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황현희(28)는 산을 오르는 맛을 아는 개그맨이다. 모두들 조급하게 앞으로 차고 나갈 생각만 하고 있는 연예계에서 거리를 재고 걸어야 할 때와 쉬어야 할 때를 배분하는 차분한 안목을 지녔다. “조사하면 다 나와”를 외치던 황 검사는 ‘집중토론’에서 편파적인 진행을 하는 진행자로 변신했고, 이제는 ‘아무리 먹어도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지 않는 시리얼’을 고발하는 PD가 됐다. 그만의 일관된 스타일을 갖고 전체를 펴 보였다 접었다 하면서 조금씩 전진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요즘 인기 많아졌겠다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은데, 전혀 못 느끼겠어요. 인터뷰 요청이 좀 늘었다는 것 정도요? 정장 입고 나가면 그래도 사람들이 알아보는데 편하게 입은 날은 아직 잘 못 알아보세요.”

잘 차려 입은 정장, 무표정한 얼굴, 상대방을 몰아붙이는 말, 유치하지만 당당한 마무리까지. 그가 했던 코너들을 떠올려보면 ‘황현희식 개그’라고 부를 만한 일정한 그림이 그려진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황현희 본인을 명확하게 인식시킬 만한 그 ‘한 방’이 없어서 조금은 아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황현희 PD의 소비자 고발’이 첫선을 보이던 날, 시청자들은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였고 그렇게 황 PD는 제대로 ‘빵’ 터졌다.

“원래 제가 하는 코너는 초반에 반응이 좋은 경우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와’ 이런 반응이 나와서 제가 오히려 당황했어요. ‘이거, 앞으로 어떻게 이어가야 하나’걱정까지 들더라니까요.”

이쯤에서 이 대박 코너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풀어보자면, 원래 이 코너는 ‘유세윤 PD의 소비자 고발’이 될 뻔했다고 한다. 그런데 캐릭터가 맞지 않는다 싶어 그에게 넘어왔다. 문제는 장동민, 안영미와 함께했던 첫 녹화는 편집의 가위를 피해가지 못했던 것. 김대범, 정명훈, 안영미와 함께했던 두 번째 녹화분 역시 방송을 타지 못했다.

“유민상씨가 덩치도 크고 해서 주눅 들어 하면 상황이 더 재밌을 것 같더라고요. 저는 전체적으로 큰 틀을 짜고 그 안에 코드를 배치하는 걸 잘하는 반면에 세부적인 데 약한 편인데, 민상이 형이 제 취약점을 잘 짚어줘요. (안)영미는 표현을 잘 살리고요.”

듣는 이의 무릎을 탁 치게 할 만큼 기발한 아이디어가 생명인 코너라 매주 아이템을 짜는 데 골머리를 썩는다. 제품을 소재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시간 날 때마다 대형 마트나 백화점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광고 카피를 유심히 살펴보며 아이디어를 구한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가장 재미있었다고 생각하는 고발 제품은 ‘아무리 먹어도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지 않는 시리얼’이다. ‘범죄의 재구성’ 코너를 할 때 최고의 유행어였던 “조사하면 다 나와”를 외쳤을 때보다 더 큰 웃음을 이끌어냈던 당시의 희열이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단 한번에 붙은 개그맨 시험 원래 그는 공무원이 되려고 했었다. 보수적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법학과에 입학한 뒤 검찰 사무직, 경찰 시험, 지방직 공무원 시험 등에 응시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 서핑 중 ‘전유성의 코미디시장’이라는 극단에서 누구든 단원으로 받아준다는 공고를 보고 무작정 항로를 돌렸다. 그 때 함께 극단 생활을 했던 동기가 신봉선, 안상태, 김대범, 박휘순이다.

“별 생각 없이 올라간 무대가 굉장히 멋진 곳인 걸 곧 깨닫게 됐어요. 제가 정면을 보다가 눈을 옆으로 돌리니까 수많은 사람의 눈이 저를 따라오는 거예요. 내 행동, 내 말 하나하나에 사람들이 시선을 주는 것이 너무 매력적이고 행복했어요.”

동기들과 함께 응시한 KBS 개그맨 공채시험에 그는 한번에 합격했다. 어차피 한 곳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인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 싶었던 공무원에 대한 미련은 완전히 접어버렸다. 하지만 시험을 보던 지나간 시간이 헛된 것만은 아니다. 그 때의 고민과 좌절이 지금의 ‘황현희식 개그’의 초석이 됐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막연한 밑그림만 가지고 개그맨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예전부터 주병진 선배님, 김용만 선배님을 워낙 좋아했어요. 망가지지 않고도 새로운 방법으로 자신만의 개그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충격적이기까지 했죠. 뭐든 한 번은 운 좋게 뜰 수 있겠지만 그 뒤에 철저한 계획이 없다면 금방 미끄러지게 돼요. 욕심이 나더라도 우선 전면에 나서고 한발짝 빠지고 이 수위를 조절하면서 제가 잘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를 두고 ‘늘 똑같다’, ‘식상하다’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황현희는 ‘스스로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어떻게 잘 살려나가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장의 부담감은 크겠지만 항상 그런 부담감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고 극복해야만 ‘롱런’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결국 마지막으로 그가 듣고 싶은 말은 ‘황현희식 개그’를 확립했다는 평가이기 때문이다.

김기열과 유민상을 몰아붙이는 다소 뻔뻔한 표정이 워낙 자연스러워 평소 모습이 아닐까 했는데, 실제 황현희는 카메라 앞에서 웃음 짓는 것조차 어색해하는 의외로 조용한 남자다. 다만 무뚝뚝한 성격은 화면에서 보여지는 것과 비슷하단다.

“그래도 사람 좋아하고 워낙 술을 좋아해서 한가할 때는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술 마시는 걸 즐겨요. 심야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하고요. 최근에는 ‘다크나이트’를 봤는데, 너무 좋아서 3일 동안 밤잠을 설쳤어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개그콘서트’ 후배들과는 막역한 사이다. 특히 같이 코너를 하는 ‘김실장(김기열)’과는 코너에서와는 달리 아주 친한 사이라고.

사랑받고 자란 사랑스러운 여자 만나고파 캐릭터 탓인지, 솔직한 성격 탓인지 유독 그에게는 이상한 소문 몇 가지가 따라다닌다. 하나는 그가 재벌가 자제라는 것. 처음에는 그도 ‘뭔 소린가’ 하고 웃어 넘겼는데, 이제 정말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것 같아 큰일이다 싶다. “주로 후배들이랑 코너를 많이 하다 보니 밥도 많이 사주고 술도 많이 사줬어요. 또 제가 차를 정말 좋아해서 자주 바꾸는 편인데 그래서 그런 얘기가 나온 게 아닐까 싶어요. 처음에는 방송에서 웃기려고 몇 번 받아 넘겼는데 전혀 아니에요. 저, 치열하게 돈 벌어요.”

어느 인터뷰에서 그가 스스로 말했다는 ‘나는 나쁜 남자’라는 소문은, 어느 정도는 맞단다. 마음은 있으나 워낙 무뚝뚝한 성격이라 이성에게는 잘 못해주는 편이라고. 얼마 전 그가 게스트로 참여하는 라디오에 알렉스가 나왔는데. ‘발 마사지’ 이야기를 하는 그를 향해 황현희는 DJ와 합세해 격분을 표했다고 한다.

“하긴 그런 섬세함이 필요한데 말이죠. 그래도 솔직히 나쁜 남자는 아니에요. 대화가 잘 통하는 좋은 사람을 만나면 잘해주고 싶어요. 저, 정말 외모는 안 봐요. 세상을 현명하게 헤쳐 나가는 그런 분이었으면 좋겠고, 아, 사랑받고 자란 사랑스러운 사람이면 좋겠네요.”

아직까지는 연애에 대한 계획보다는 개그에 대한 계획이 훨씬 섬세하게 세워져 있는 터라 우선 당분간은 이 쪽 산을 오르는 데 땀을 쏟아야 할 것 같다. 평생 공부해야 한다는 지론에 따라 요즘도 모든 방송사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녹화해 ‘이 상황에서 나라면 무슨 말을 할까’ 등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순발력과 내공을 쌓기 위해서다. 무턱대고 발을 디뎠다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철저하게 운동화 끈을 조여 맨다.

누군가를 알게 됐을 때, 그 사람의 과거를 알고 싶은 이가 있고 다음이 궁금해지는 사람이 있다. ‘황현희식 개그’로 진화하는 황현희는 알면 알수록 내일이 궁금해지는 남자다. 막연한 다음이 아니라, 그가 치밀하게 계획해둔 내일 말이다. 그는 지금 그가 올라야 할 다음 고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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